
저녁 식사를 마치고 받아쓰기 공책을 펴 놓고 연필을 쥐었는데, 한 줄도 못 쓰고 손을 놓습니다. "다섯 번만 쓰자" 했는데 딱 한 번 쓰고 손을 흔들며 "손 아파"라고 말합니다. 머리로는 답을 알고 있는데, 그걸 손으로 옮기는 것 자체를 자꾸 미룹니다.
오늘은 아이가 왜 유독 "쓰는 일"만 싫어하는지, 그리고 그 앞에서 부모가 무엇을 다르게 볼 수 있는지를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. 글씨를 더 예쁘게 만드는 방법이 아니라, 왜 손을 놓는지를 먼저 보겠습니다. 다그치기 전에 먼저 알아 두면 좋은 것들입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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Q. 왜 유독 쓰는 것만 이렇게 싫어할까요
말은 잘하고 읽기도 곧잘 하는 아이가 쓰기 앞에서만 유난히 버티는 경우가 있습니다. 머리로 아는 것과 손으로 써 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기 때문입니다.
연필을 쥐고 선을 긋는 데는 소근육 발달이 필요합니다. 손가락 끝의 작은 근육들이 연필을 적당한 힘으로 쥐고, 손목이 그 힘을 받쳐 주면서 조금씩 움직여야 글자 모양이 나옵니다. 이 작은 근육들이 자라는 속도는 아이마다 다르고, 큰 근육(뛰기·던지기)보다 늦게 자라는 경우도 흔합니다.
그래서 또래보다 공을 잘 던지는 아이가 연필은 유독 서툴게 쥐는 일이 생깁니다. 몸이 전체적으로 둔해서가 아니라, 손끝의 작은 근육이 아직 그 일을 감당할 만큼 자라지 않았을 뿐입니다. 몇 줄만 써도 손이 쉽게 피로해지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.
어른은 연필을 쥐는 일이 너무 당연해서, 아이가 "손 아파"라고 하면 꾀병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. 하지만 작은 근육이 덜 자란 손에는, 몇 분의 쓰기가 어른이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노동일 수 있습니다.
Q. 그럼 억지로 더 쓰게 하면 나아질까요
손이 쉽게 지친다는 것을 모르고 "더 써야 글씨가 좋아진다"며 양을 늘리면, 아이에게 쓰기는 점점 더 피하고 싶은 일이 됩니다. 여기서 생기는 것이 쓰기 회피입니다. 쓰는 행동 자체가 주는 신체적 피로가 반복되면, 그 피로를 피하려는 마음이 "하기 싫다"는 감정으로 겉에 드러납니다.
겉으로는 "게을러서 안 쓴다"처럼 보이지만, 속을 들여다보면 몸이 먼저 지친 경험이 쌓여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. 이 상태에서 양을 더 늘리면, 손의 피로와 싫은 감정이 함께 커져서 다음번엔 연필을 쥐는 것 자체를 미루게 됩니다.
그래서 양을 늘리는 쪽보다, 짧게 쓰고 자주 쉬는 쪽이 도움이 됩니다. 다섯 줄을 한 번에 시키는 대신, 두 줄을 쓰고 손을 털고 다시 두 줄을 쓰는 식으로 끊어 주면, 같은 양을 쓰더라도 쓰기 회피가 덜 쌓입니다. 글씨의 모양보다 "오늘 손을 몇 번 폈다가 다시 쥐었는지"를 먼저 보시면, 아이의 상태가 더 잘 보입니다.
쓰기 전에 손가락을 풀어 주는 간단한 동작(손가락 깍지 끼고 늘리기, 손바닥으로 책상 두드리기)도 도움이 됩니다. 운동 전에 몸을 푸는 것처럼, 쓰기 전에 손끝 근육을 깨워 주는 것입니다. 몇 초밖에 안 걸리지만, 처음 몇 글자를 쓸 때 손이 덜 뻑뻑하게 움직입니다.

Q. 연필 말고 다른 방법으로 써도 될까요
쓰기 자체를 조금 다른 길로 들어가 보는 것도 방법입니다. 꼭 연필과 공책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잠깐 내려놓으면, 아이가 손을 쓰는 일에 다시 흥미를 붙일 자리가 생깁니다.
굵은 색연필이나 크레파스로 큰 종이에 낙서처럼 글자를 써 보게 하는 것, 손가락으로 모래나 밀가루 위에 글자를 그려 보는 것도 같은 손 근육을 쓰는 활동입니다. 평가받는 느낌 없이 손을 움직이는 경험이 쌓이면, 다시 연필을 쥐었을 때의 부담이 조금 줄어듭니다.
화이트보드에 쓰고 바로 지우는 방법도 있습니다. 틀려도 바로 지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, "잘 써야 한다"는 압박이 줄어듭니다. 공책에 남는 흔적이 없으니 실수에 대한 긴장도 함께 낮아집니다.
연필 자체를 바꿔 보는 것도 방법입니다. 손에 비해 너무 가늘거나 미끄러운 연필은 쥐는 힘을 더 많이 쓰게 만듭니다. 손가락 자리가 파여 있는 삼각 연필이나 조금 굵은 연필로 바꿔 보면, 같은 시간을 써도 손이 덜 지치는 경우가 많습니다. 글씨를 잘 쓰게 만드는 도구를 찾는 것이 아니라, 손이 덜 힘들게 쓸 수 있는 도구를 찾는다는 마음으로 골라 보시면 됩니다.
앉은 자세와 책상 높이도 손의 피로에 영향을 줍니다. 팔꿈치가 책상에 편하게 닿지 않거나 의자가 너무 높으면, 손목이 어색한 각도로 꺾인 채 계속 쓰게 되어 더 빨리 지칩니다. 책상과 의자 높이를 아이 체형에 맞게 한 번 점검해 보시는 것도, 글씨 교정보다 먼저 손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.
Q. 형제자매와 자꾸 비교하게 될 때는 어떻게 할까요
같은 집에서 자란 형이나 언니는 글씨를 또박또박 쓰는데, 동생은 유난히 힘들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. 이럴 때 "형은 이만큼 쓰는데 너는 왜 안 돼"라는 말이 먼저 나오기 쉽습니다.
하지만 손끝 근육이 자라는 속도는 형제자매 사이에서도 다릅니다. 한 아이는 또래보다 일찍 자랐고, 다른 아이는 조금 늦게 자라는 중일 뿐입니다. 비교하는 말은 손의 속도를 빠르게 만들어 주지 못하고, 대신 쓰기 앞에서 느끼는 불편한 감정만 더 키웁니다.
형제를 비교하는 대신, 그 아이가 지난주보다 오늘 몇 글자를 더 버텼는지를 봐 주시는 쪽이 더 도움이 됩니다. 옆집 아이나 형제가 아니라, 어제의 그 아이와만 비교하는 것입니다. 그 작은 차이가 쌓이면, 어느 순간 손이 눈에 띄게 편해지는 때가 옵니다.
형이나 언니가 먼저 "넌 왜 그렇게 못 써"라고 놀리는 경우도 있습니다. 그 말이 아이 입에서 나올 때는, 같은 비교를 어디선가 먼저 듣고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일 때가 많습니다. 형제 사이의 말버릇도 결국 집 안에서 어른이 먼저 쓰는 말에서 옮아간다는 점을, 한 번쯤 떠올려 보셔도 좋습니다.
맘맘톡
정리하면, 쓰기를 싫어하는 아이는 게을러서가 아니라 손끝 근육이 아직 자라는 중이고, 그 피로가 쌓여 쓰기 회피로 굳어진 경우가 많습니다. 양을 늘리기보다 짧게 끊어 주고, 손을 풀어 주는 작은 동작을 더하는 것이 더 빠른 길입니다.
당부를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. 또래보다 글씨가 느리다고 해서 "우리 아이만 이상하다"고 단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. 손 근육이 자라는 속도는 아이마다 다르고, 시간이 지나면 많은 경우 자연스럽게 따라잡습니다. 다만 짧게 끊어 주고 몇 주가 지나도 손 떨림이나 심한 통증이 계속된다면, 그때는 소아과나 발달 전문가와 한 번 이야기해 보시는 것을 권합니다.
두 아이를 집에서 가르치며 검정고시를 치르고 대학까지 보내는 동안, 저도 두 아이 중 한 아이의 글씨 쓰기 앞에서 꽤 오래, 꽤 자주 씨름했습니다. 처음에는 "왜 이렇게 안 쓰려고 하지" 싶었는데, 짧게 끊어 쓰게 하고 중간에 손을 풀어 주면서부터 연필 드는 일을 덜 미루게 됐습니다. 그 사이 바뀐 것은 아이의 의지가 아니라, 제가 준 쉬는 틈이었습니다.
오늘 저녁 받아쓰기 공책을 또 밀어낸다면, 다섯 줄을 한 번에 시키는 대신 두 줄씩 나눠 보세요. 손을 털 틈을 주고 다시 시작하면, 같은 양도 훨씬 수월하게 끝납니다.
오늘도 연필 앞에서 아이와 씨름하시는 부모님들께, 그 몇 줄이 헛되지 않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. 글씨가 삐뚤빼뚤해도, 그 줄을 끝까지 채운 손은 분명히 자라고 있는 손입니다. 오늘 두 줄을 채웠다면, 내일은 분명 그보다 조금 더 수월해져 있을 것입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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